들어가며
자신의 장점을, 나는 바로 말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봄밤이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계절치고는 아직 쌀쌀해서, 나는 불을 끈 방에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3년 동안 거의 매일 입던 교복은 이제 다시 입을 일 없는 옷이 되어 있다.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로 흩어져 갔다. 내일 일정은 없다. 다음 주 일정도, 다음 달 일정도 없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그렇게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과도 조금 다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 해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그 실마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고등학교 3년은 눈앞의 하루하루를 즐기기에도 바빴다. 그다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루가 다음 하루를 데려와 주었기 때문이다. 그 하루하루가 졸업식을 경계로 한꺼번에 멈춰 섰다.
그렇다면 우선 나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보자.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보일 것이다.
내 장점은 무엇인가. 단점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가. 언제 행복을 느끼고, 언제 미움을 품는가. 지금까지 언제 좌절해 왔는가.
어느 것 하나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점을 생각하면 어디선가 들어 본 말만 떠오른다. 어느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말이 아니었다. 같은 교실에 있던 누구에게 갖다 대도 대개는 들어맞고 만다.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몇몇 얼굴은 떠오르는데,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행복했던 순간이라면 여럿 떠올릴 수 있다. 그게 왜 행복했는지 설명하려고 하면, 말이 거기서 멈춰 버린다.
시간을 들이면 그럴듯한 답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남의 말을 내 모양대로 오려서 붙여 놓은 것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말은, 누구에 대한 설명도 되지 못한다.
돌아눕자, 이불 틈으로 스며든 찬 공기가 목덜미에 닿았다. 집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18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사용해 온 나라는 제품의 사양에 대해, 나는 무엇 하나 대답하지 못했다.
가전제품을 사면 상자 안에 사용 설명서가 들어 있다.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 되는 사용법, 상태가 좋지 않을 때의 대처법. 설명서를 쓰는 것은 대개 그 제품을 만든 사람이다. 속을 가장 잘 아는 건 만든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나라는 제품을 만든 것은, 대체 누구인가.
그날 밤의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방 한구석에 책상의 윤곽이 떠올라 보였다. 3년 동안 한 번도 앉지 않은 책상이다.
3년 전, 나는 내 손으로 나에게서 가장 큰 부품을 떼어 낸 적이 있었다.
1. 제품 사양
중학생 때의 나를 설명하는 데는, 게임 하나만 이야기하면 충분하다.
포트나이트. 100명의 플레이어가 하늘에서 같은 섬에 내려앉아,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게임이다. 섬은 이윽고 폭풍에 삼켜지고, 안전한 곳은 조금씩 좁아져 간다. 무기를 줍고, 벽이나 계단을 순식간에 쌓아 올려 몸을 지키며, 쫓고 쫓긴다.
나는 이 게임의 온라인 대회에 나갈 만큼 푹 빠져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책상으로 향한다. 저녁을 다 먹으면 곧장 다시 책상으로 돌아간다. 쉬는 날에는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줄곧. 시간만 나면 나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수백 번, 수천 번 되풀이한 조작은 더 이상 머리를 거치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린 쪽으로, 생각보다 먼저 벽이 서 있다. 총에 맞았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다. 헤드폰 속의 발소리와 총소리, 그리고 내 숨소리. 하루 중 가장 오래 듣던 소리는 그 세 가지였다.
대회 전에는 이기기 위한 연습을 한다. 지면 왜 졌는지 생각한다. 이겨도 더 잘할 수 있었던 장면을 찾는다. 위에는 늘 더 위가 있고, 그 위에도 또 위가 있다. 쫓아야 할 뒷모습은 끝이 없었다.
이렇게 쓰면 꽤 열심인 소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열심이다’라는 자각이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려면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고들 한다. 즐거우니까 계속할 수 있는 거라고도 한다. 내 경우에는 그 어느 쪽도 들어맞지 않았다. 즐거워서 한 게 아니다. 의욕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숨 쉬는 게 즐거우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즐겁다거나 즐겁지 않다거나 하는, 그런 잣대 바깥에 있는 일이니까. 나에게 포트나이트는 그런 것에 가까웠다. 의욕이 나지 않는 날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다. 의욕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나는 매일 책상에 앉아 있었다.
하는 것이, 삶 그 자체였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아마 부족하다. 좋아하는 것은 다른 좋아하는 것과 나란히 놓고 견줄 수 있다. 저것도 좋지만 이게 더 좋다, 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게임은 다른 무언가와 나란히 놓일 자리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하루의 생활이 그 주위에 늘어서 있었다. 식사도, 잠도, 학교도 그 틈새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아시아 7위.
그 결과가 나온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시아 곳곳에서, 나처럼 날마다 책상에 앉아 지내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회였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남은 건 순위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나는 통화를 연결해 둔 게임 친구와 함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순위표를 위에서부터 세어 일곱 번째.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 뒤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곧바로 트위터에 글을 올렸을 것이다. 지금은 X로 이름을 바꾼, 그 SNS 말이다. 당시 나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팔로워도 수천 명 있었다.
게시물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아는 이름이든 모르는 이름이든, 반응이 잇달아 날아든다. 알림 숫자가 보고 있는 동안에도 자꾸만 불어난다. 내 이름이 내가 모르는 곳까지 실려 간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누군가에게 칭찬받으려고 책상에 앉아 있던 게 아니다. 숨 쉬듯 되풀이해 왔을 뿐이다. 그 숨에, 처음으로 바깥에서 형태가 주어졌다. 아시아 7위라는 숫자와, 셀 수 없이 많은 반응.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것들이 대신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 만약 그때의 내가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답할 수 있었던 건, 그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안다고 믿고 있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시간을 쓰고, 무엇에 진심일 수 있는지. 그 전부를 그 게임과, 그날의 숫자와, 화면 너머의 반응이 알려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책상에 앉아 있는 나야말로 나의 전부였다.
고등학교 입학이 다가올 무렵, 나는 그 ‘전부’를 저울 한쪽에 올리게 된다.
2. 부품 교체
저울 한쪽에는 포트나이트를 올렸다. 삶 그 자체였던 시간과, 아시아 7위라는 숫자와, 수천 명의 팔로워까지 통째로.
다른 한쪽에는 이제 막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을 올렸다.
앞으로의 내 인생을 꾸려 가는 데 어느 쪽이 열쇠가 될까. 내가 재 보려 한 것은 그것이었다.
둘 다 올려 둔 채 조금씩 해 나가는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 순위는 시간만 나면 책상에 앉아 있었던 결과다. 한쪽을 고르는 것은 다른 한쪽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무게만 비교한다면 포트나이트 쪽이 훨씬 무겁다. 몇 년 치의 시간과, 마침내 손에 넣은 결과와,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자리와, 나라는 존재의 대부분이 거기 올라가 있으니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고등학교 생활은 접시 위에 있어도 형체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동급생, 다녀 본 적 없는 학교 건물, 아직 하루도 보내지 않은 3년.
그런데도 저울은, 떠올린 바로 그 순간 이미 기울어 있었다.
가벼워야 할 접시 쪽으로.
고민할 틈도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택했다.
무언가를 부수거나 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 책상에 앉기를 그만두었다.
책상은 그대로 방에 남았다. 모니터도, 헤드폰도, 의자도 어제까지와 같은 자리에 있다. 달라진 것은 거기 앉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뿐이다.
설명서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라는 제품의 가장 큰 부품을 내 손으로 떼어 낸 셈이다. 보통 그렇게 하면 제품은 작동을 멈춘다. 적어도 한동안은 덜컹거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빈자리에 들어온 것은, 사람이었다.
화면 너머에도 사람은 많다. 섬에서 서로 총을 쏘는 100명의 플레이어. 게시물에 반응해 주는 수천 명의 팔로워. 통화 너머에서 함께 결과를 기다려 준 친구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이름과 목소리까지였다. 상대가 어떤 얼굴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거기 있는지를 나는 거의 몰랐다.
교실에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이름 옆에 얼굴이 있다. 목소리에는 말이 되기 전의 한 박자가 있다. 농담을 하면, 웃음이 터지기까지의 아주 짧은 틈까지 고스란히 담긴 반응이 돌아온다. 같은 곳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일로 실없이 웃는다. 고작 그것뿐인 일이, 이렇게나 재미있다.
실제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 그리고 그 가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한, 좀처럼 손이 닿지 않던 것이었다.
그 게임을 떠올릴 겨를은 거의 없었다.
3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입학식이 있던 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졸업식 아침이 와 있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고들 하는데, 그 말은 정말이었다. 그 3년은 그전의 어떤 3년보다 짧고, 어떤 3년보다 진하다.
그 선택은 옳았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여기서는 아직 미뤄 두겠다. 옳았다고 단언하려면,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왜 그토록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었을까.
묵직한 접시가 아니라 형체조차 없던 접시 쪽으로, 저울이 한순간에 기운 것은 왜일까. 그때의 나는 그 이유를 한 번도 말로 옮기지 않았다. 말로 옮기지 않은 채 골랐고, 말로 옮기지 않은 채 3년을 내달렸다. 고를 수 있었다면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된 것은, 졸업한 뒤의 그 봄밤이었다.
3. 고장 신고 전 확인 사항
다시 그 봄밤으로 돌아가 보자.
어둠 속에 떠오른 책상을 바라보며, 나는 3년 전의 저울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토록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었을까.
이유 자체는 생각보다 쉽게 찾았다. 고등학교 생활에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포트나이트는 3년 뒤에도 거기 있다. 끝이 있는 것과 끝이 없는 것. 그때 내가 재고 있던 것은 무게가 아니라,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끝이 있는 것을 고른다. 그것뿐이라면 누구나 내세울 수 있는 논리다. 같은 저울 앞에서 같은 논리를 알고 있어도, 게임 쪽 접시를 고르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한순간에 고등학교 생활을 고를 수 있었던 것은 논리를 알아서가 아니다. 논리보다 먼저, 무언가가 저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여기서 처음에 늘어놓았던 질문들이 다시 돌아온다. 내 장점은 무엇인가.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 그 3년이 즐거웠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런데도 왜 즐거웠는지를, 나는 내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결단은 할 수 있었다. 주저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그런데도 나는 나를 알지 못했다.
결단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을 안다는 것은, 다르다.
생각해 보면, 중학생 때의 나는 나에 대한 설명을 남에게 맡기고 있었다.
아시아 7위라는 숫자. 수천 명의 팔로워. 잇달아 날아든 반응. 그것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설명서는 내가 한 줄도 쓰기 전에, 어느새 바깥에서 다 쓰여 있었던 것이다.
책상에 앉기를 그만두었을 때, 그 설명서도 책상에 두고 왔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의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명서도 없이, 나는 나라는 제품을 3년 내내 전력으로 가동했다. 고장도 나지 않고, 멈추지도 않고, 오히려 그전의 어떤 3년보다도 잘 돌아갔다.
그랬기에 더욱, 멈췄을 때 어디를 봐야 할지 알 수 없다.
졸업식이 끝나고, 하루가 더는 다음 하루를 데려오지 않는다. 쉬지 않고 돌아가던 제품이 처음으로 조용해진다. 그제야 나는 내 손에 설명서가 한 장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가장 먼저 펼쳐야 할 페이지. 고장인가 싶을 때 읽어야 할 페이지가, 어디에도 없다.
얕았다.
18년 동안 나를 가장 오래 지켜본 것은, 나 자신이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누군가 바깥에서 써 준 몇 줄과, 즐거웠다는 기억뿐이었다. 숫자는 내가 얼마나 게임을 잘하는지 알려 주었다. 기억은 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알려 주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내가 왜 그런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고 믿는 것과 정말로 아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골이 있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그 골의 가장자리에 섰다.
그때부터 나는 내 설명서를 쓰기 시작했다. 종이 위가 아니다. 언제, 누가 물어도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장점을 쓴다. 단점을 쓴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가. 언제 행복을 느끼고, 언제 미움을 품는가.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지우고, 나에게만 들어맞는 말을 찾았다.
그렇게 나를 파고들다 보니, 또 하나의 윤곽이 조금씩 뚜렷해졌다.
나는 무엇에서 멀어져야 하는가.
4. 사용 환경
가전제품 설명서에는 대개 ‘사용 환경’이라는 항목이 있다. 직사광선이 닿는 곳이나 습기가 많은 곳에서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잘 만든 제품이라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본래의 성능을 내지 못하게 된다.
내 설명서에도 그 항목이 필요했다.
나는 무언가에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금세 입 밖으로 꺼낸다. 해 보고 싶다. 그거 돼 볼까. 어제까지 생각도 안 하던 것을, 오늘은 벌써 말하고 있다.
주변에서 보면, 떠오르는 대로 내뱉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떠오르는 대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말들은 한 번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다. 입 밖에 낸 모든 말이 인생의 통과점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걸음을 멈추지 않더라도, 그곳을 지나왔다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큰 꿈만큼 이룰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을 진심으로 좇는다. 나에게는 그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말을 꺼내면, 부정하고 드는 어른이 적지 않았다.
가령 내 꿈이 이루어질 확률이 10%라고 하자.
부정하는 쪽에 서면, 그 말은 90%의 확률로 들어맞는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봐, 내가 뭐랬어”라고 할 수 있고, 설령 이루어져 버린다 해도 부정했던 말 따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빗나가도 잃을 것이 없다.
부정은 가장 안전한 내기다. 그래서 많은 어른이 마음 편히, 기분 좋게, 남의 꿈을 부정할 수 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반듯한 어른이다. 평범하다는 것, 상식적이라는 것, 당연하다는 것. 그런 것이야말로 훌륭하다고 믿고, 그 잣대로 나를 재고, 삐져나온 부분을 바로잡으려 한다.
다만 나에게는 그 반듯함이 가장 해로웠다. 반듯한 말에는 반박하기 어렵다. 옳음이라는 것으로 얻어맞으면, 맞은 쪽이 틀린 것처럼 보이고 만다.
나를 알지 못하던 때에는, 그런 어른에게서 멀어질 이유도 흐릿한 채였다. 껄끄럽다, 안 맞는다, 왠지 싫다. 그것만으로는 단순한 투정과 구별되지 않는다.
설명서를 쓰기 시작하고 나서, 그 윤곽이 뚜렷해졌다. 내가 멀어져야 할 사람은 나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전한 곳에서, 마음 편히 부정하는 사람이다. 상식이라는 잣대로 내 모양을 깎아 내려는 사람이다.
반대로, 귀 기울여야 할 말도 있다.
그것은 옳음으로 때리는 말이 아니다. 내가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곁에서 받쳐 주려는 말이다.
때리는 말은 나를 멈춰 세우려 한다. 받쳐 주는 말은 내가 계속 달릴 수 있도록, 길의 가장자리가 어디인지 알려 준다. 10%의 꿈 앞에서, 때리는 사람은 90% 쪽에 선다. 받쳐 주는 사람은 빗나가면 함께 지는 자리에, 나와 나란히 서 준다.
그래서 나는 전자와 거리를 둔다. 학교에서도, 학교 밖에서도, 주저 없이. 그건 상대를 말로 꺾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라는 제품을, 본래의 성능을 낼 수 있는 곳에 두기 위해서다.
3년 전 책상에서 멀어졌을 때의 나는, 이유를 말로 옮기지 않은 채 골랐다. 지금의 나는 이유를 말로 옮긴 뒤에 멀어진다. 같은 ‘내려놓기’라도, 그 감촉은 전혀 다르다.
자신을 알고 난 뒤, 자신에게 해로운 것에서 멀어지고, 성장에 족쇄가 되는 것을 내려놓는다. 나는 이런 삶의 방식에 ‘비움 라이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만 어느 쪽의 내려놓기든, 그것만으로는 옳지도 틀리지도 않다. 옳았는지 아닌지가 정해지는 것은, 언제나 내려놓은 뒤다.
5. 제품 보증
가전제품 상자에는 설명서와 함께 보증서가 들어 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올바르게 사용하면, 고장이 나도 고쳐 준다. 산 시점에 이미, 그 제품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약속해 주고 있다.
결단에는 보증서가 따라오지 않는다.
포트나이트를 내려놓은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를, 고른 순간에 약속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부정하고 드는 어른들과 거리를 둔 것도 마찬가지다. 내려놓은 것은 돌아오지 않고, 가지 않은 길 그 너머를 확인할 방법도 없다.
3년이 끝나자, 나는 다시 책상에 앉게 되었다.
예전과 같은 방식은 아니다. 시간만 나면 내내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적당히. 지금은 취미로, 지나치지 않을 만큼 즐기고 있다. 삶 그 자체였던 게임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 3년 동안에도 계속 책상에 앉아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더 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순위도, 팔로워 수도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 있는 것은 이미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웃는 즐거움을 모른 채, 이름과 목소리의 세계에서, 바깥에서 쓰인 설명서에 기대어 살아가는 누군가.
그 사람이 불행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건 내가 아니다.
처음에 던져 둔 물음에, 여기서 답해 두고 싶다. 나라는 제품을 만든 것은, 대체 누구인가.
나를 만든 것은, 나의 결단이다.
책상에 앉기를 그만둔 것. 교실에서 사람들과 웃은 것. 그 봄밤, 내가 얕았음을 인정한 것. 부정하고 드는 어른들에게서 멀어진 것. 결단 하나하나가 부품이 되어, 지금의 나를 조립하고 있다. 그중 하나라도 달랐다면, 완성된 것은 다른 제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명서를 쓸 수 있는 것도, 나밖에 없다. 순위표도, 팔로워 수도, 상식이라는 잣대도 아니다.
그리고 보증서를 쓸 수 있는 것도, 나밖에 없다.
나는 모든 결단을 옳았다고 단언할 수 있도록, 지금을 살고 있다.
‘옳았다’와 ‘옳았다고 단언할 수 있도록 산다’는,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다르다. 전자는 과거에 대한 판정이고, 후자는 오늘의 내가 할 일이다. 그 저울이 옳았는지는, 그날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정한 것은 그 뒤의 3년이었고, 그 봄밤이었고, 오늘이다.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정해 나갈 것이다.
옳음은 고른 순간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써넣어 가는 것이다.
그 3년을, 나는 전력을 다해 즐겼다. 그것이 책상을 떠난 결단을 옳은 것으로 만든 첫 줄이었다. 그날 밤 마주해야 했던 얕음은, 설명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제야 조금씩 의미를 띠어 가고 있다. 어른들에게서 멀어진 일은, 10%의 꿈을 진심으로 계속 좇아야만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직 써넣는 중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비율 하나를 정해 두었다. 노력이 8, 놀이가 2. 삶에 대한 나만의 황금 비율이다.
중학생 때의 나는 게임에 내 전부를 바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그 게임을 0으로 만들었다. 한 번씩 양극단으로 치우쳐 보았기에, 지금의 나는 나에게 딱 맞는 눈금의 위치를 안다.
2만큼의 놀이 안에, 지금은 그 게임이 있다. 책상은 이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그래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기는 하다.
마치며 — 개정 이력
그 봄밤 이후로, 나는 일곱 가지 질문에 언제든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해 두고 있다.
장점. 단점.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행복을 느낄 때. 미움을 품을 때. 좌절했던 때.
그 답은, 여기에 쓰지 않는다.
하나는, 그것이 내 설명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답이 하나로 굳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설명서의 답은 한 번 쓰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걸어온 만큼, 성장한 만큼, 때로는 낙담한 만큼 다시 쓰여 간다. 떠오르는 대로 내뱉은 ‘해 보고 싶다’가 인생의 통과점이 되듯이, 오늘의 답도 언젠가는 통과점이 된다.
그래서 설명서에 덧붙는 것은 잘 풀린 날의 일만이 아니다. 낙담한 날에도 나는 설명서를 펼친다. 약점이 적혀 있지 않은 설명서는, 정작 필요할 때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제품 설명서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개정 기록이 실려 있기도 하다. 몇 번째 판에서, 언제, 어디를 고쳤는지.
내 설명서에도 그것이 있다. 초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열여덟 살 봄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을 고쳐 썼는지, 이제는 세지 않는다.
가장 최근 줄에는 오늘 날짜만 적혀 있다. 그 옆은 아직 비어 있다. 무엇을 써넣을지는, 앞으로의 내가 정한다.
자신의 장점을, 당신은 바로 말할 수 있을까.